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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365+∂

질퍽이던 길


퍼렇게 멍이 들다못해 이젠 보라색으로 변해버린 마음의 멍울들이 먹먹하게 심장을 조여오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도리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가봐야 한다.
먹먹한 심정으로 창문을 슬쩍 열었는데 눈발이 날리고 있다.

막 잠에서 깨서 바짓자락에 매달리려고 하는 녀석을 번쩍 안아들고 이야기 한다.
"아가~~ 눈이 온다..눈이..  첫눈이네..."

거실의 큰 창문을 열어주니 아이는 깡총 깡총 강아지 새끼마냥 팔짝인다.
당장 나가고 싶어서 움찔거리는걸 겨우 진정시켰다.
잠이 덜 깬 녀석이 밖으로 튀어나가면 얻는 것은 감기뿐이리라.
게다가 눈발 날리는 모양을 보아하니 조금 더 많이 와 줄 듯 했다.
거기다가 뇌성까지 내리쳤다.

아이를 달래고 뭔가를 먹이고 나서 눈위에서 팔딱이게 해 줄 요량으로 창밖을 봤는데.. 이런... 벌써 눈은 그치고 녹기 시작했다.

그냥.. 감기 조금 걸리더라도
첫눈을 느끼도록 해 주는건데.

나도.. 나이를 먹고 퍽퍽해지더니.. 아이의 맑고 고운 심성을 그렇게 무심히 짓밟는구나..싶다...

그나마.. 언듯 본..그 눈 발 날리는 모습에 나도 잠깐.. 기분이 묘하게 좋아졌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자랑하는 울 아들이랑 같이 첫눈 내리는 걸 봐서 다행인걸까..싶기도 하다...
내년엔.. 울 아들이랑.. 손잡고 첫눈 맞아봐야지..싶기도 하고.


뒤죽박죽... 번개맞은 내 맘을 어거지로 가방안에 쑤셔넣고.. 아이의 옷가지를 챙기고.. 그리고 갈현동에 갔다.
얼음장보다 더 차가워진 마음으로 가서 그런지 아무런 느낌이 없다.
이러면 안 되는데..싶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바보처럼 어느 것 하나 정리되지 않았으면서 거짓된 모습으로 또 앉아있다.
욱 해서.. 뭔소리를 할지 모르는 내 맘을 다스리려 십자수를 챙겨갔다.
한땀 한땀 뜨면서..하고 싶은 말을 꾹꾹 내리누른다.

참자..참자.
아픈 어른 계신데..
참자..참자..
아직 결정난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하루밤을 억지로 지새우고 서둘러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도망치듯 온다.

아이는 집에 와서.. 기분이 좋다.
자기 맘대로 놀고 소리지르고
콩알만한 집구석에서 힘이 넘친다.

나도 숨통이 좀 트인다.
아이 먹을 우유를 사서 냉장고에 챙겨놓고..

원래 며칠전에 해 먹으려고 사 뒀던 김밥 재료를 꺼내서 김밥을 싼다.
내 속이 아닌데 그래도 아이를 굶기기 싫어서..
그리고  아이에게 집에서 내가 싸준 김밥을 먹어봤다는 작은 추억한자락 주기 위해서
이것 저것 바쁘게 준비하는 동안 머리속에 잡 생각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곤 아이는 지쳐서 잠이 들고.. 나만 남는다.
온갖 망상이 날 괴롭히기 시작하고.. 또 나만 미쳐날뛰기 시작하겠지.
내 상처에선 다시 피가 흐르고 내 멍은 쑤시기 시작하겠지.

긴 밤이.. 날 죽여놓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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